
운이 아니라 설계였다
이번 A매치 4연전에서 나온 손흥민의 프리킥 골. 궤적이 대단하지도, 파워가 압도적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운이 좋았다”, “골키퍼가 막았어야 했다”는 말이 많이 나왔다.
페어포인트의 시각은 다르다. 이 골은 아주 미세한 세트피스 설계가 큰 차이를 만든 장면이다. 그 뒤에는 모레노 감독이 데려온 한 코치가 있다. 니코 보시 코치다.
니코 보시는 누구인가

처음 알려진 직함은 골키퍼 코치였다. 세트피스까지 맡는다는 소식도 이어졌다. 골키퍼 코치가 세트피스를 겸하는 건 2010년대부터 유럽과 MLS에서 퍼진 흐름이다. 지금은 흔한 방식이다.
그런데 보시 코치는 그 틀에도 딱 맞지 않는다. 지난 6월까지 MLS 오스틴 FC에서 일했고, 팀 내부에서는 ‘세트피스 CEO’로 불렸다고 한다.
숫자가 그 별명을 설명한다. 이번 시즌 오스틴의 오픈 플레이 슈팅은 약 180개로 리그 30개 팀 중 최하위였다. 반면 세트피스 슈팅은 100개가 넘었다. 전체 슈팅 대비 세트피스 슈팅 비율은 리그 1위다. 팀 공격이 사실상 보시 코치의 세트피스에 기대고 있었다는 뜻이다.
대표팀 4연전을 본 사람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모레노 감독 다음으로 카메라에 가장 자주 잡힌 사람이 보시 코치였다. 경기 중 필드 플레이어들과 계속 대화했다. 통역과 함께 설영우에게 지시하는 장면도 있었다. 보통의 골키퍼 코치에게서는 보기 힘든 그림이다.
포지션이 아닌 상황으로 나눈다
축구 경기는 흔히 네 국면으로 나뉜다. 공격, 수비 전환, 수비, 공격 전환이다.
보시 코치가 맡은 영역은 그중 두 지점이다. 우리 수비 국면의 끝맺음, 그리고 우리 공격 국면의 시작이다. 상대 공격을 어떻게 끝낼지, 후방 빌드업을 어떻게 시작할지를 설계한다. 여기에 골키퍼와 세트피스 코칭이 더해진다.
모레노 사단은 코치진을 공격, 수비, 골키퍼 같은 포지션으로 나누지 않는다. 전술적 상황으로 나눈다. 벤투 사단과 비슷한 부분도 있지만, 축구를 이해하는 방식이 조금 다르다.
농구의 인바운드 플레이를 떠올리면 쉽다. 작전 타임 뒤에 누가 어디서, 어떤 각도로 공을 받고, 주변 선수가 어떻게 움직일지 다 정해져 나온다. 모레노호는 스로인 하나에도 그런 패턴을 준비하겠다는 생각이다.
스로인도 세트피스다
월드컵에서 오래 기억에 남은 장면이 있다. 전반 33~34분쯤, 왼쪽 측면에서 스로인을 하려던 이기혁이 팔을 들고 외쳤다. “아무도 없어!” 줄 곳이 없었다.
이 장면은 우연이 아니었다. 오른쪽의 설영우나 다른 선수가 스로인을 할 때도 줄 곳이 없는 경우가 반복됐다. 전략이 없었던 걸까, 있었는데 작동하지 않은 걸까.
세트피스 약점은 모레노 감독 본인의 숙제이기도 하다. 소치에서 경질된 뒤, 구단 관계자는 모레노 체제에 세트피스 전술이 없었던 게 심각한 문제였다고 말했다. 그 해답으로 데려온 사람이 보시 코치다.
오스틴은 파이널 서드에서 얻은 스로인을 사실상 코너킥처럼 썼다. 롱스로인이 니어포스트 쪽 두 명에게 날아가고, 반대편 포스트의 한 명이 수비 시선을 벌려 놓는다. 니어포스트에서 백헤더로 떨궈 주면, 중앙으로 갑자기 침투한 선수가 마무리한다. 4월 토론토 원정에서는 거의 같은 구조로 실제 골이 나왔다.
효과는 상대의 반응으로도 드러났다. 세인트루이스 선수가 스로인을 받는 선수 앞에서 온몸을 뻗어 점프하는 장면이 나올 정도로 견제가 심해졌다.
손흥민의 프리킥, 이재성의 엉덩이
다시 그 골로 돌아가 보자. 손흥민이 킥을 할 때 벽 앞에 엎드려 있던 선수가 있다. 이재성이다.
이재성이 엎드리면서 손흥민에게 슈팅 각이 생겼다. 손흥민은 이재성과 상대 4번 수비수 사이로 낮게 깔아 찼다.
골키퍼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공은 이재성의 몸을 지나는 순간에야 보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 전에는 가려져 있었다. 슈팅까지 빨랐다. 반응할 시간이 사라진 것이다. 작은 디테일 하나가 골키퍼의 타이밍을 빼앗았다.
이것이 보시 코치의 순수한 작품인지, 두 선수가 훈련 중에 맞춘 플레이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우리 대표팀은 손흥민의 오른발, 이강인의 왼발만으로도 직접 프리킥 기회가 많은 팀이다. 여기에 기회 자체를 설계하는 코치가 더해졌다면, 기대를 걸어볼 만하다.
루틴이 아니라 코디네이션
보시 코치는 세트피스 패턴 몇 개를 정해 놓고 돌리지 않는다. 그는 루틴을 싫어한다고 했다. 세트피스 코칭은 루틴이 아니라 코디네이션이라는 것이다.
그의 개인 홈페이지에는 다섯 단계의 워크플로우가 정리되어 있다.
- 영상으로 상대의 세트피스 수비 방식을 분석한다.
- 그에 맞춰 선수별 위치와 움직일 타이밍을 설정해 전달한다.
- 팀 훈련에서 실제로 리허설한다.
- 경기 후 세트피스 장면을 영상으로 돌려보며 피드백한다.
- 다음 경기에서 이 과정을 반복한다.
미국 대표팀 출신인 오스틴 공격수 크리스티안 라미레스의 증언도 같은 방향이다. 보시 코치는 상대 세트피스 수비의 미세한 습관을 잡아내 매 경기 전략을 따로 준비한다고 했다. 약속된 자리에 서지 않거나 타이밍을 놓친 선수는 비디오 분석에서 예외 없이 지적받는다고도 했다.
그래서 오스틴의 세트피스는 경기마다 조금씩 달랐다. 키커가 헤딩 좋은 선수에게 올려주는 수준이 아니다. 오픈 플레이만큼 정교한 전술로 접근한다.
오스틴에서 나온 장면들
인터 마이애미 원정, 벽 속의 벽. 공격팀 두 명이 상대 수비벽 옆에 자기들만의 벽을 세웠다. 킥 순간 두 선수가 반대 방향으로 튕겨 나가고, 열린 틈으로 프리킥이 들어갔다. 니어포스트 슈팅인데도 골키퍼는 시야가 가려 반응이 늦었다. 이 골로 오스틴은 메시의 홈구장 새 경기장에서 처음 골을 넣은 원정팀이 됐다. 손흥민과 이재성의 골과 원리가 같다.
움찔하게 만드는 한 명. 비슷한 장면이 또 있다. 한 선수가 수비벽 바로 앞에 서 있다가 킥 순간 몸을 돌려 뛴다. 벽이 움찔하는 사이 킥이 벽을 뚫고 골이 됐다.
샌드위치 스크럼. 상대가 맨마킹을 하면, 세 명이 바짝 붙어 헤더 타깃을 가운데 숨긴다. 양옆 두 명이 먼 포스트로 흩어지는 순간, 장신 수비수 하인스 아이크가 니어포스트로 침투해 헤더로 마무리했다. 농구 인바운드에서 자주 쓰는 방식이다.
두 번째 접촉에서 시작되는 세트피스. 보시 코치는 세트피스가 킥에서가 아니라, 킥을 받는 선수의 첫 터치에서 시작된다고 본다. 코너킥을 먼 포스트의 장신 수비수에게 보낸다. 그는 직접 슈팅하지 않고 헤더로 니어포스트 쪽 빈 공간에 떨군다. 거기서 작고 빠른 공격수가 슈팅한다.
미끼 질주. 멀리 있던 선수가 키커 쪽으로 전력 질주해 수비를 끌어당긴다. 그 순간 키커는 반대편 포스트로 올린다.
발뒤꿈치 한 번. 두 선수가 킥을 의논하듯 서 있다가, 한 명이 발뒤꿈치로 공을 옆으로 빼준다. 갑자기 나타난 세 번째 선수가 그대로 때려 골을 넣었다.
수비 세트피스도 설계한다. 상대가 코너킥을 짧게 돌려 중거리 슛을 노리자, 오스틴은 맨마킹을 버리고 골문 앞에 진을 쳐 슈팅 각을 막았다. 세트피스 수비에서 조직적인 오프사이드 트랩도 썼다.
진짜 4-4-2 전문가
모레노 감독과 빅토르 브라보 코치가 4-4-2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4-4-2를 더 많이, 더 오래 경험한 사람은 보시 코치다.
그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4-4-2 신봉자 파코 로페스 감독 밑에서 10년 넘게 코치로 일했다. 비야레알, 레반테, 그라나다, 카디스를 거치며 대부분의 경기를 4-4-2로 치렀다. 로페스와 헤어진 뒤 오스틴에서도 니코 에스테베스 감독과 4-4-2를 썼다. 수비 전술을 맡는 코치인 만큼, 대표팀이 4-4-2를 쓰는 건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핵심은 레반테 시절이다. 2018-19시즌 레반테는 세트피스 득점에서 알라베스에 이어 바르셀로나와 공동 2위였다. 바르셀로나는 메시 혼자 직접 프리킥으로만 6골을 넣은 팀이다. 레반테는 직접 골보다 기회를 만들어 넣는 팀이었다. 천재 한 명의 팀이 아니라 전략의 팀이었다.
오스틴에서도 차이는 분명했다. 보시 코치가 있던 이번 시즌 15경기에서 세트피스로 9골을 넣었다. 그가 떠난 뒤 13경기에서는 3골에 그쳤다.
그래도 걱정되는 지점들
여기까지만 들으면 엄청난 코치가 온 것 같다. 하지만 불안 요소도 분명하다.
첫째, 소통. 보시 코치의 방식은 지시가 정확히 전달되고 선수들이 정확히 이해해야 작동한다. 이강인, 백승호처럼 스페인어가 되는 선수도 있고, 보시 코치도 영어를 어느 정도 한다. 하지만 2014년부터 2024년까지 스페인에서만 일했다. 첫 해외 무대인 MLS도 스페인어 사용자가 많은 환경이다. 한국은 다르다.
둘째, 대표팀이라는 환경. 모레노 감독과 함께 일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사단 대부분이 월드컵에 나갈 수준의 국가대표팀은 처음이다. 경기마다 전략을 바꾸는 그의 스타일이 짧은 소집 기간에도 통할지가 관건이다.
셋째, 수비 실적. 다섯 팀에서 14시즌을 보냈지만, 레반테에서 라리가 중위권을 지킨 몇 시즌을 빼면 안정적이었던 적이 드물다. 레반테에서도, 그라나다에서도 성적 부진으로 시즌 도중 팀을 떠났다. 이번 시즌 오스틴은 그가 수비를 맡은 4-4-2로 6월까지 15경기 31실점, 경기당 2골 이상을 내줬다. 그가 떠난 뒤 3-4-3으로 바꾼 오스틴은 13경기 27실점으로 오히려 나아졌다. 0점대 실점 팀이 없는 MLS 기준으로는 개선이다.
페어포인트 이준우의 시선. 시즌 전반기 오스틴은 아주 나쁜 팀은 아니었다. 다만 결정적인 순간에 와르르 무너졌다. 4골, 5골씩 내주는 대패가 반복되면서 구단이 결단을 내렸다.
세트피스는 좋은 키커가 있으면 엄청난 무기다. 하지만 실행할 선수 구성이 받쳐주지 않으면 위험 요소가 된다. 세트피스를 앞세운 팀이 화제는 되지만 꾸준히 잘된 경우는 드물다. 한번 간파되면 상대가 대응하기 쉽기 때문이다. 복잡한 만큼 훈련 시간도 많이 든다. 클럽에서도 어려운 일인데, 훈련 시간이 짧은 대표팀에서 통할지는 의문이다.
그래도 기대를 거는 이유
의문은 남는다. 그래도 세트피스 전략이 처음부터 없는 것보다, 이렇게 준비해 나오는 편이 낫다. 한두 개의 무기는 갖고 있어야 한다. 기본적인 준비, 일종의 실사를 하는 셈이다.
우리 키커들은 엘리트다. 손흥민의 오른발, 이강인의 왼발이 대표적이지만, 프리킥이 좋은 선수는 그 밖에도 많다. 황인범의 코너킥도 괜찮다. 한 방이 있는 선수들이 그 무기를 제대로 살릴 수 있게 연습되어 있어야 한다.
선수들에게는 처음 경험하는 방식일 수 있다. 그 신선함도 무기다. 특히 소집 기간이 길어지는 큰 대회에서 효과가 더 나올 수 있다. 정보 보안과 숙성 시간을 생각하면, 진짜 성과는 11월 A매치와 아시안컵에서 더 잘 보일 것이다.
MLS를 떠나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 온 보시 코치. 그의 코칭이 아시안컵과 월드컵에서 그냥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좋은 결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